여체화! 세계의 독재자 열전에 등장한 박정희에 관한 서술 번역


 아쉽게도 박정희는 일러스트가 없지만 왠지 흥이 나서 한번 옮겨봤습니다. 지식이 일천하여 오역이나 적절한 용어를 사용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래 서술은 저 개인의 의견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떼어놓기 어려운 일본과의 인연 아래 - 박정희
생몰년 : 1917년 11월 14일 ~ 1979년 10월 26일
독재기간 : 1963년(대통령 취임) ~ 1979년(암살)

 박정희는 한국의 발전과 모순을 특히 대일관계에서 나타낸 인물이다.
 한반도 남동부에 있는 경상북도 농촌에서 태어난 박정희는 사범학교 졸업 후에 소학교 교사가 되었는데, 군사교련 교관인 일본군인에게 영향을 받아 혈서로 탄원한 끝에 일본국적으로 1942년 만주군 군관학교, 1944년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창씨개명을 통해 "다카키 마사오"로 이름을 바꾼 박정희는 1945년 소련군의 만주 침공에서도 만주군 중위로 참전했지만, 일본 항복과 만주국 소멸에 따라 194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한에서는 미군정 하에서 반일반공 민족운동가인 이승만이 지휘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준비를 진행하며 후에 "친일파"로 규탄받는 식민지 시대의 대일 협력자를 탄압하고 있었다. 게다가 형이 공산주의자로 적발되어 경찰에 사살당하고, 박정희 자신도 한국군 내의 공산주의자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만주군 시절의 인맥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자 박정희의 운명은 바뀌어 독립 후인 1950년 6월에 시작된 한국전쟁에서도 활약, 미국 유학도 갔다. 전쟁 중에는 육영수와 재혼, 1952년 딸 박근혜, 1958년에는 아들 박지만이 태어났다.
 그리고 1961년 5.16 쿠데타로 추대되어 1963년에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형의 딸과 결혼한 김종필을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기용해 반정부 운동을 심하게 탄압했는데, 이러한 박정희 정권을 경제면에서 도와준 것이 일본이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의 반일주의에서 정책을 전환해 1965년에 한일 기본조약을 체결, 일본 정부로부터 일괄적으로 받은 식민지배 보상금을 기반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의 기초를 구축했다. 또 박정희는 전 만주국 관료였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신뢰를 얻어 자민당 강경파와의 친교를 쌓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을 흔든것도 일본이었다. 1973년에는 중앙정보부가 야당 정치가인 김대중을 도쿄에서 서울로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 1974년 8월 15일에는 광복절 기념일에 연설중이던 박정희를 재일한국인 2세인 문세광이 저격해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문세광 사건"이 발생했다. 양국 관계 악화를 저지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아내와의 사별로 비탄에 빠진 박정희에게 일본은 만년까지 고민의 씨앗이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자신도 중앙정보부장이자 동향 후배인 김재규에게 술자리 도중 암살당한다.
 하지만 박정희의 영향은 개발독재형 군사정권의 지속이라는 형태로 남아, 민주화 후인 1997년에 대통령이 된 김대중도 김종필을 국무총리로 삼아 박정희 정권이 이룬 경제발전의 성과를 칭찬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청렴결백함은 한국 국민의 향수를 불러 일으켜 딸인 박근혜가 2012년에 보수 여당인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오게 되었다.(글 / 나카니시 마사키 中西正紀)

덧글

  • 윤소정 2012/12/10 23:44 #

    단순 오역 및 표현수정
    1. "만주군 중좌"가 아닌 "만주군 중위"가 맞습니다.
    2. "김대중 사건"의 정식 한국명칭은 "김대중 납치사건".

    저자의 이름인 中西正紀는 "나카니시 마사키"정도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김주현 2012/12/11 01:18 #

    지적 감사합니다. 반영하여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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